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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평화신문][특집/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이도기 바오로(1743~1798)(2011년 10월 18일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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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내포교회사연구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51회   작성일Date 23-03-1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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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이도기 바오로(1743~1798)

    전 재산 바쳐 충청도 내포지역 복음화에 힘써... 청양과 홍주, 공주, 정산 등지 두루 다니며 전교... 정사박해 때 붙잡혀 1년간 옥살이 끝에 1798년 순교... 가혹한 매질과 배교 회유에도 굳건히 신앙 지켜

    오세택 기자 입력 2011.10.18.07:47 수정 2011.10.19.17:57


    "그 아내 돈을 판비(辦備, 준비)해 술과 안주를 갖춰 가지고 가서 먹으라 권하는데 답하되 '성모가 나를 십자가 위에 두어 계시니 (음식을 먹는 것이) 가하지 않다. 예수가 성가(聖架, 십자가) 위에 계셔 다만 독한 괴로움을 받으심을 듣고, 이러한 맛을 드심은 듣지 못한지라. 이제 나의 당한 바 십자가와 다름이 없으니 차마 먹지 못하겠노라.' 두세 번 권하니 면강해(억지로) 먹는지라. 앉으나 누우나 항상 대월(對越, 현실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마주 뵘)하더니 홀연 '주여', 이 회언(誨言, 훈계하는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후 주와 성모께 감사함이 이상하더라. 겨울을 만나매 앉은 곳과 무릎 위가 심히 차서 견디기 어렵더니 성탄일에 또 일차 수형한 후에 난 상처와 무릎 위의 뜨겁기가 불같으니 '주님이 내 마음이 찰까 염려하시어 특별히 형벌로써 뜨겁게 한다'하더라." (「뎡산일기-이 바오로 도긔 순교전기」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에서)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나


    박해시대에 신자들 사이에 영적독서와도 같은 형태로 전해지던 필사본이 있다. 54쪽 분량에 불과했지만, 비전(秘傳)으로 전해져 공동체 내 영적 갈증을 풀어줬다. 이 필사본을 통해 박해를 받던 신자들은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함께 신앙을 다져나갔다.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정산(뎡산)일기」다.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이웃한 정산에서 순교한 이도기(바오로, 1743~1798)라는 한 인물의 전 생애를 다룬 짤막한 책이었지만, 출생과 성장과정은 간단히 언급한 뒤 대부분을 수감생활과 신문과정, 신앙고백, 순교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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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가 전하는 말 : 수 차례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순교하기로 결심한 이도기에게 어느 날 천사들이 나타나 위로하고 있다.


    이도기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 수난에 견줘 서술하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여러 차례 정산 장터로 끌려가 정산현감 최윤천과 군중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이 마치 빌라도 총독과 군중 앞에서 고난을 당하는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심문을 받는 시간 설정과 죽음의 순간에 이도기가 아버지 하느님을 부르는 모습 등도 성경 속 예수 수난을 빼닮았다. 이를 통해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정산일기」는 이도기의 순교를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부각시키려 한다.


    그래선지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1855년 2월 22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정산일기」를 '세월이 흘러도 그 광채를 잃지 않는 보석'에 비유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이도기는 1743년 충청도 청양 태생으로 1797년 정사박해 때 붙잡혀 이듬해 순교했다. 향년 56살이었다.


    그가 언제 입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784년 조선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같은 해 내포에 천주교가 전해져 활발하던 초창기에 입교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그의 입교와 전교 활동은 순교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과 결코 무관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활동시기가 이존창이 '내포의 사도'로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겹칠 뿐 아니라 그가 감옥에 갇혀 문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옥졸들이 "이존창이 이미 처형됐으니 너도 곧 죽을 것이다"고 거짓으로 위협하는 대목을 보면 어느 정도 이존창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는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미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쓰고 청양뿐 아니라 홍주(현 홍성)와 공주, 은진 등지를 두루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를 통해 입교한 신자들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홍주의 이세채, 보령의 김성옥, 청양의 이원경, 은진의 이상원, 공주의 김선룡 등이다. 이들은 관변 기록인 「사학징의」를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이도기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는 죄목으로 전국 각지에 유배됐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도기를 통해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이 「정산일기」 앞부분에 드러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


    이도기는 자신의 이름이 근방에 널리 알려지자 칠갑산을 넘어 정산으로 피신, 한 옹기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전교로 이 마을 사람들도 모두 입교했다.


    그렇지만 그의 전교는 그곳에서 멈춘다. 1797년 정사박해가 시작되자 인근에 김이라는 성을 쓰는 외교인이 그를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고발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겁을 먹은 아내는 도망가기를 권했지만, 그는 자신의 처신이 걸림돌이 돼 신입 교우들이 넘어질 것을 염려해 이를 거절하고 집에 남았다.


    아내 권고를 마다하고 정산에 머물던 그는 1797년 6월 8일 체포된다. 포졸들은 그의 집을 뒤져 십자고상과 천주교 관련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인근 숲속으로 끌고가 매질을 하며 주문모 신부 은신처와 동료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닦달했으나 헛일이었다. 정산현감도 고상과 책을 살펴보고 그에게 신앙의 스승과 제자들을 대라고 다그쳤으나 역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배교를 하라는 매질과 벼슬을 주겠다는 회유가 이어졌으나 그는 정산감옥과 장터에서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했다. 심지어는 배교를 강요하는 현감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인정에 끌려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자녀들이 감옥에 면회오는 것을 막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켰다. 이에 그를 회유하지 못한 현감은 그를 체포한 지 1년을 막 넘긴 1798년 6월 12일 무수한 매질 끝에 그를 죽였다.


    그 장면이 정산일기를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마침내 사형집행일이 됐다고 알려주자, 이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포졸들에게 끌려가 정산 형장에 다다른 그는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주변에 모인 미신자들까지도 이 가혹한 형벌에 가세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하례하나이다'하고 외쳤다. 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했고, 다리가 부러지기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그는 버려진 채로 남겨졌다. 이틀 뒤 저녁 무렵, 정산현감은 그의 죽음이 궁금했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이고 오라'고 명했다. 포졸들은 이 지시에 따라 그의 몸을 짓이겼다.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가 순교하던 날 밤 큰 광채가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유해는 정산현감의 명에 따라 묻혔는데, 7~8일 뒤 정산 인근에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발굴해 자신들이 살던 마을로 안장했다."


    #올곧은 신앙과 성모신심 돋보여


    「정산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이도기의 믿음살이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에 대한 신심, 철저한 성모신심으로 요약된다. 옥중에서도 그는 현실을 뛰어넘어 천주를 뵙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고, 마지막 심문 때 극도의 고통 중에 있음에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를 부르며 늘 천주 곁에 머무르려 했다.


    옥중생활과 고난 또한 예수님과 성모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통해 이겨냈다. 「정산일기」라는 짧은 필사본은 그가 지녔던 올곧은 신앙과 지극한 성모 신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정산일기


    이도기의 삶을 기록한 전기다. 시기별로 그의 삶을 기록했기에 '일기'라는 표제를 붙였지만, 정확히는 일기가 아니라 전기다. 흔히 책 제목은 아호에서 따와 붙이지만, 「정산일기」라는 제목에 나오는 '정산'은 호가 아니라 그가 신앙을 뜨겁게 증거하고 순교하기까지에 이른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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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일기」를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는 최근에 낸 「정산일기」 해제를 통해 "내용상 이도기의 부인이나 그 후손들이 속한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가 구술(口述)을 종합해 엮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다. 그러기에 「정산일기」는 상당부분 부인이나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손들의 구술을 통해 집필된 뒤 필사되는 과정을 거쳐 내용이 첨삭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집필 시기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블뤼 주교가 1854년 편지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미뤄 1830년대 이전에 저술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마지막 필사본은 1882년 경기도 연천에서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발견 혹은 헌정된 것으로, (재)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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